일상저널/삶의 단상

간증

인세인피지 2011. 3. 13.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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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한 직후 부터 몸담었던, 천안의 '행복한 꿈의 교회'에서의 공식적 마지막예배를 드리는 오늘, 담임목사님이자 매형인 정은호 목사님께서 귀한부탁을 해오셔서, 두서없이 적어낸 글입니다. 창피하지만, ㅋ 이것 또한 은혜!

순서:

1.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한때는 이랬으나, 이후 세상을 알아버린 죄 많은 사람, 부족한 사람)

2. 그 상태로 나는 줄곧 나 자신만을 의지하고, 찾지를 않았었다.

3. 하지만, 나는 인정하게 됐다. 부인할 수 없는 진리는 존재한다는것을

4. 결과적으로, 계획된 데로 인도하시는 데로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5. 지금은 이렇다.

6. 앞으로는 이렇게 살 것이다.


본문:

1.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한때는 이랬으나, 이후 세상을 알아버린 죄 많은 사람, 부족한 사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위로 누나 둘을 두고 태어난 나는 충남공주 출신이다. 어린시절의 추억중 내게 기억에 남는 것은 4~5살 때인가 서산 해미교회에서 성탄전야제때 독창을 했었던것들,, 이렇게 나는 교회, 신앙,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리 넉넉하진 않았지만, 특별한 부족함도 없었던 유년시절을 보내던 중에 남들보다 사춘기가 일찍왔었던 것 같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통해 인간답게 자라날 수 있는지 등과 같은 나이에는 맞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고민도 해보고 반항도 해 봤으니 말이다. 한때는 동네 불량스런 형들과도 어울려서, 절도도 해보고 학생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했었던것 같다. 그 당시에는 담임선생님이 아버지와 잘 알고 지내셨던 분 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참 철없었던 것 같다. 그때가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신훈섭형제와 같은 반이 었었다. 이후, 중학에 진학하고 나름에 철이 들었던 것 같다. 3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은사님의 훈육방식에는 다소 어려움을 겪었지만, 덕분에 천안에서 이름이 있는 고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교회 학생회에서 임원도 해보고, 교회 수련회나 문학의 밤 행사를 통해서, 그리고 선교단 내에서 율동팀을 하며, 봉사하고 나의 신앙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때 갖았던 믿음의 크기는 실제로는 보잘것 없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믿음이 진정성의 측면에서 볼 땐 가장 순수하고, 진실했는지 모르겠다. 이후 고교에 진학하고나서, 제 2의 사춘기가 왔던것 같다. 공부라는 것에는 중학교 때 경험으로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고, 스스로도 학생이라는 본분에 충실하기 보단, 삶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것은 :“숱한 경험이다”라고 치부하게 되었다. 여기서 내가 말한 경험은 즉, 노는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번도 공부하라 다그치신적이 없던 부모님은 나를 믿어주셨지만, 그렇게 고교 3년의 시간이 흘렀고, 수능점수를 받아든 내 손에는 초라한 성적표만 남게 되었다. 같이 놀았던, 친구들 또한, 그들이 원하고 소망했던 학교를 갔던 친구는 없었다. 결과는 암담했다. 또래 대부분이 재수를 하거나,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공부말고도 아버지께서 물려 주신 운동신경이 있다는 생각으로 체대입시를 생각하게 되었다. 체계적으로 준비하지 못한탓이었는지, 2003년도 정시 입시에서 탈락이라는 쓴잔을 받아 들고, 멀리 강원도 강릉의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2. 그 상태로 나는 줄곧 나 자신만을 의지하고, 찾지를 않았었다. 그땐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아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어린시절 순수하고, 천진했던 절대자에 대한 믿음은 퇴색되고, 먹고 놀기 좋아하는 흔한 대학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강릉에는 사촌형이 목회를 하시기 때문에 주일은 반드시 지켰지만, 그뿐 더 이상 그곳에서, 내 마음속에는 신앙에 대한 간절함도 필요성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입학 동기들의 평균성적보다 고득점으로 입학하게 되어, ROTC에는 수월하게 입단하였다. 훈련이 시작된 3학년부터는 대한민국 육군장교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마도, ROTC라는 또 하나의 경험이 스스로에게 큰 의미를 부여했던것 같다. 이제, 진로를 정해야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것은 체육교육을 전공했기에 체육교사가 될 것인지, ROTC를 통해 직업군인의 생활을 할 것인지, 혹은 전공과는 무관하게 다른 업종에 종사할 것인지, 그당시는 기도하지 않았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언가에 죽도록 매달리지도 않았다. 4학년이 되자, 그러한 생각이 더욱 복잡해졌고, 체육교육과를 나왔으니, 우선은 체육교사가 되어보자 라는 목표를 정했다. 목표가 정해지자 목적의식도 생기게 되었다. 졸업반 때는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공부도 ROTC도 운동도 동아리 활동도, 그러나 유독 신앙생활은 소홀했다.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가서는 결코 원하는 바를 이룰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3. 하지만, 나는 인정하게 됐다. 부인할 수 없는 진리는 존재한다는것을

2007년은 두 가지 사실이 교차 하던 시기였다. 하나는 목표하던 체육교사가 되는데 실패 한 것, 두 번째는 육군 장교로서 소위 계급장을 달고, 드디어 임관하게 되었던것, 내 인생에는 실패란 없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대학입시 때 실패하고, 취업에도 실패했다. 두 번째 실패다. 못한다 라는 말을 죽기 보다 싫어하는 나로서는 자존심의 문제였고, 존재의 문제였다. 입대를 한 달 반 앞두고, 임용에 떨어진 나는 말 그대로, 폐인이자, 패자였다. 의미없는 술자리의 향락과 늦은 귀가, 자연스레 집에서 말 수는 적어지고, 스스로의 자존감도 한없이 낮아졌다. 부모님은 이제 처음 본 시험인데 뭘 낙심하느냐 다독이셨지만, 그만큼 열심히 준비했고, 다시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는 정말 간절하게 준비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실패를 두려워했었던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얼마전 목사님과 신훈섭형제가 다녀왔던 TD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믿기지 않게, 신앙의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다. 자세한 이유는 여러분들도 참여해 보면 알것이다. 상처로 얼룩졌던 내 마음은 TD를 통한 은혜로 주님께서 치유해 주셨고, 앞으로 살아갈 일이 헤쳐나가야 할 당면 과제를 바라 보게하셨다. 다시금 군 업무에 관한 의욕도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 신앙적인 외로움, 갈급함이 채워졌기에 마음에 평안을 안고 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군에서의 많은 일들도 나누고 싶지만 시간관계상 줄이고, 어쨌든 나의 군생활은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나름의 선전을 했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동기이자 친구인, 임 면 형제와 무심결에 내뱉었던, 오래된 교회의 건물을 새로 짓는데 사용되었고 최전방 DMZ작전을 수행하면서 숱한 지뢰들 사이를 걸으면서도 단 한건의 사고도 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4. 결과적으로, 계획된 데로 인도하시는 데로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깨닳았다. 내가 겪은 두 번의 실패는 더 이상 실패를 모르는 젊은 나의 상처가 아닌, 인생의 경험이고, 그때마다 하나님을 찾게하셨던, 당신의 계획이라는 것을, 요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에 애초에 나를 , 김평강을 어떻게 만드시겠다는 계획을 갖으신것 같진 않다. 다만, 하나님의 충성된 종인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나도 충성하고 헌신하면, 어느정도의 축복은 주시려고 생각하신것 같다. 물론,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말이다. ㅎ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미 길이 열려 있다. 모태신앙 만의 축복이다. 내가 살 길은 열려있는 길을 잘 닦는 것이다. 실패를 통해서 겸손을 알게하시고, 실패를 통해서 갈급함을 알게 하셨다. 궁하면 통한다 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기다림의 미학을 알게 하신것이다.

5. 지금은 이렇다.

요즘 나는 행복하다. 꿈에그리던, 그동안은 꿈에 그리던 체육교사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현장에 나와보니, 내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는것같다. 꿈에 그리던 체육교사의 임무를 수행해 보니, 처음이기에 실수도 있고, 모르는것 투성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감사한 것은 군대에서 거의 겪어봤던 일들이다. 어쩌면, 중학생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쉽다. 행정적인 부분도 교사들과의 관계도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감사한 일이다. 아마, 졸업과 동시에 내가 시험에 합격했더라면, 군 생활을 열심히 했을 리가,없다. 어쩌면, 열심히 하지 않았기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 계획하신것이다. 부족한 것을 채우고, 더 많이 배우게 하시기 위해, 그래서 지금의 난 행복하다.

6. 앞으로는 이렇게 살 것이다.

모태 신앙을 갖고, 이러한 환경에서 자랐던 나의 경우는 좀 특이한 경우이다. 이름도 너무나도 특이하지 않은가, 어려서는 내 이름 자체가 기독교인이라는 굴레로 작용하는 것 같아서, 거북했던 적도 있다. 자기 이름이 거북하다는 느낌을 이해 할 수 있는가,ㅎ 사실이다. 정말 가끔은 그랬다.

여기 있는 많은 분들이 모태 신앙이 아닐것이다. 그것이 축복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더욱아닐것이다. 우리아버지도 모태신앙이 아니셨고, 대한민국의 믿음의 조상들은 대부분 모태신앙이 아니었다. 아닐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데 그분들은 축복의 삶을 살다 가셨다. 말인즉슨,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축복 받을 수 있는길은 널려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 누구에게나 축복의 계획과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두셨다. 이제 선택은 여러분이 하면된다. 내가 2007년 믿음의 회복을 경험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선택하던지, 이미 첫사랑을 겪은 분이라면, 그 사랑을 회복하던지, 아니면 지금 그 첫사랑을 하고 계시다면 계속 이어가면 되겠다.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워낙에 원대하기에 각 사람이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각 사람은 그 원대한 계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인 계획하심을 각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달라고 기도하거나 애원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랑을 느끼고, 진리를 믿는다면, 이제 행하라, 몸으로 행동으로 보여 줘라. 여러분도 지금의 나 처럼 행복을 경험하는 기적을 체험 할 것이다. 요즘 나는 참 감사하다. 이미 다른 계획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대된다. 끝.

2011년 3월 13일

김평강이라 쓰고, 인세인피지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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