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저널/삶의 단상

질투는 나의 힘

인세인피지 2011. 2. 17. 15:21
반응형

 아, 나른한 오후, 피터스의 선험적 정당화를 공부하려니, 이 나른한 오후에 쏟아지는 잠을 이길 힘이 없네, 문득 묵상을 해야겠다며, cgn tv의 생명의 삶을 시청하는데,

 

 질투와 우상숭배에 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케하셨으니, 책상앞에서 꾸벅이 10시간 하는 것보다야, 감사할 따름 ㅋ

 

인간의 질투와 조물주인 하나님의 질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것. 본래 다른 의미를 지녔기에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부적합인데,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말하기도 그렇고, ㅋ

 

질투에 관한 고찰인즉, 소유에 관한 문제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질투는 자기것이 아닌 대상에 대한 질투가 대부분인데 반해,

하나님의 질투는 자기것에 대한 애착으로 볼 수 있다. 쌩뚱맞게 조물주인 하나님의 질투하심이 가당키나 하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성경에는 30회가 넘는 하나님의 질투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분노, 참혹한 결과를 여러군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지어다" 라는 십계명의 제일 계명은 질투의 하나님을 여실히 느끼게 하는 대목. 오늘의 말씀은 감성적인 이해보다는 논리적 정당성에 의지하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갈 부분은 인간의 질투에 대한 정의인데, 자신의 소유가 아닌 대상에 대한 질투,, 자신의 소유를 어느선까지 규정해야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법적기준인 혼인(페미니스트가 아니라도, 결혼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내 생각에 펄쩍 뛸 지 몰라도, 일단 이해를 돕기위함이라고 치부하자)에 둘 것인가. 아님, 단순 연인 관계에서도 소유 개념이 발생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규명하는 것이 시급하다. 사실 오늘의 묵상에서는 따로 스크랩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연애 7년차를 맞이하는 나와 선희의 관계에서 종종 발생하는 질투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 있어, 정리해 봐야겠군화' 라고 생각케됨^^;

 이 문제는 보통 자유분방함종속의 개념이 대비되는 것에서 비롯되는데, 뭐,, 각설하고, 혼인관계가 아니더라도, 진지한 만남을 갖고 있는한 연인관계에서도 일종의 서로에 대한 소속감을 갖아야 한다는 결론을 맺게 한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지한 만남이 아닌 관계, 가벼운(?)관계는 소속감을 갖을 필요가 없다는 대비의 개념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가벼운(?)관계에 대한 옳고 그름의 여부는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판단할 문제니깐~

 그러니, 인간의 질투일지언정 사랑하는 연인의 질투는 하나님급 애착으로 봐도 된다는 인류역사상 풀리지 않던 질투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이다. (선희입장에선 쾌조를 부를일; 내가 어쩌자고 이런 결론을 내리는가;) 아무튼, 인간사적 문제는 여기서 접어두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애착(질투)을 우리는 어떤시각으로 해석해야하는가? 

 온당한것으로 봐야, 생각해야, 이해해야 한다? 앞의 몇가지 표현은 그 표현 방식에서 분명히 잘못되었다. 이 문제는 애착이란,조물주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의 확증으로 우리가 느낄 문제이지. 조물주의 창조물에 대한 사랑의 확증으로 우리가 보거나 이해하거나, 생각할 문제인 것은 아니라는 것. 우리는 겸허히 당근스럽게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도 상대적 자율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근대의 많은 나신교 개념 지식인들입장에선 뭔 수동적인 인간상 애찬론이냐고 비판할 지 몰라도, 내 종교관으로 이게 진리다. (논리적 정당성을 찾는다는게 이런식으로 흘러가 버리네;;;)

 

"나 외는 다른신을 섬기지 말지니라"

 

 십계명의 제일 계명인 위의 말씀을 단지 하나님의 애착으로만 느낄 것인지, 하나님의 애착하심이 주시는 또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물론 다른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또 다른 의미가 있었으니

 사람은 자기가 경배하는 것을 닮게 마련이다. 전통 무속신앙의 하나인 토템을 예로 들자. 하찮은 것을 경배하면, 하찮은 존재가 된다. 므릇, 돌을 섬기면 돌 같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되고, ㅋ 물을 섬기면, 한없이 유하게 흐르는 강물같은 삶을 살려 노력하듯이,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애착느끼는 삶을 산다는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것' = ' 예수 그리스도 '의 삶을 닮아 가는것으로 귀결 된다. (돌이나 물의 존재 자체가 하찮다는 것이 아니다. 물 없으면 나도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성에 비하면 창조된 피조물들은 하찮다는 논리임)

 

헌데 이러한 토테미즘이, 풀, 나무, 동물, 자연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일종의 토템, 즉 우상숭배로 작용할 수 있는것이다. (이런부분까지 다루려 한건 아닌데, 분명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을것 같다. 발생하는 오해의 소지는 나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론적 문제-표현력의 부재, 앎의 부족함- 이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려는 의도는 아님) 무턱대고 하나님만 섬긴다고, 진정한 섬김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섬김은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는 섬김은 올바른 섬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단적인 믿음과 존재에 대한 믿음의 차이를 구별 하는 것이, 우상숭배와 참신앙을 구분하는 요체인데, 그 이해는 토테미즘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으로 해결된다. 토테미즘은 통상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작용한다. 예를들면,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바램(목적)을 위해 냉수를 떠다놓고 삼신할매(?)에게 비는 행위는 냉수자체에 대한 믿음에서가 아닌, 아이를 낳게해달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냉수를 사용하는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하기 위한 무엇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라면, 그것 조차도 우상숭배가 되는것이다.

 존재자체로써의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것이 진정한 섬김이지, 부귀영화, 내 삶의 안위, 내 가족, 나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일종의 우상숭배가 된다는것.

 

 결론, 진정한 경배는? 하나님 그분 자체에 대한 섬김만이 선험적 정당성을 갖는 섬김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외재적 가치 충족을 위한 섬김은 우상숭배가 될 수 있기에 조심하자.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경배, 영화로우심에 대한 찬양, 하나님이 주신 불변의 진리를 순전히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질투는 하나님의 힘?

 

것은 우리삶을 확정된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20100819 pg

 

반응형

'일상저널 >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 유  (0) 2011.02.17
어불성설  (0) 2011.02.17
단조롭게  (0) 2011.02.17
굴레(팬옵티콘)  (0) 2011.02.17
넘어지다  (0) 2011.02.17